[오피니언]가장 순도있고, 가장 신비로운 모래 이야기 (2) – 반도체의 탄생

코닝 글래스 컴퍼니(Corning Glass Company)의 엔지니어들을 처음 이 지역으로 이끈 것은 유리 제작에 사용되는 장석(長石) 이었다. 당시에도 남은 석영 입자는 여전히 원치 않는 부산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유리 제작에 알맞은 품질 좋은 소재를 항상 갈망했던 코닝의 엔지니어들은 이 지역의 석영에 주목했고, 이를 매입하기 시작해, 철도를 통해 뉴욕의 이타카에 있던 코닝 공장으로 가져갔다. 여기서 스프루스 파인산 석영이 유리창에서부터 유리병에 이르기까지 온갖 유리 제품으로 바뀌었다.

유리 산업에서 스프루스 파인산 석영의 가장 큰 성취 중 하나가 1930년대에 이뤄졌다. 당시 코닝은 남부 캘리포니아의 팔로마 천문대에 설치할 세계 최대 망원경용 거울 생산 계약을 따냈다. “The Glass Giant of Palomar”의 저자 데이비드 O. 우드버리에 따르면, 직경 200인치, 무게 20톤짜리 거울을 만들기 위해서는 화씨 2700도까지 가열된 고온의 거대 용광로에서 엄청난 양의 석영을 녹이는 작업이 필요했다.

일단 용광로를 뜨겁게 달군 후, 세 명의 직원이 계속 교대로 용광로의 한쪽 문을 통해 모래와 화학물질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재료가 녹는 속도가 더뎠기 때문에 하루 4톤
정도만 작업할 수 있었다. 녹은 재료가 용광로 바닥에 조금씩 퍼져 가면서 길이 50피트, 너비 15미터에 달하는 웅덩이 모양을 이뤘다.

이 망원경은 1947년 팔로마 천문대에 설치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별의 구성 및 우주의 크기 같은 전례 없는 중요한 발견이 이뤄졌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1930년대 코닝은 남부 캘리포니아의 팔로마 천문대에 설치할 세계 최대 망원경용 거울 생산 계약을 따냈다. 직경 200인치, 무게 20톤의 거울을 만들기 위해서는 화씨 2700도까지 가열된 고온의 거대 용광로에서 엄청난 양의 석영을 녹이는 작업이 필요했다.>
팔로마 천문대의 망원경이 의미가 컸던 것처럼, 디지털 시대가 막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스프루스 파인산 석영의 역할은 곧 훨씬 더 중요해지기 시작한다.

1950년대 중반, 일군의 캘리포니아 엔지니어들이 한 가지 발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 발명은 컴퓨터 산업의 토대가 된다. 벨 연구소의 엔지니어로 트랜지스터 발명에 일조했던 윌리엄 쇼클리는 이 연구서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시간 거리의 조용한 마을인 캘리포니아 마운틴 뷰에 자기 회사를 세웠다.

근처에 스탠퍼드 대학이 있었고, 제너럴 일렉트릭과 IBM도 이 지역에 공장이 있었으며, 신생기업 휴렛-팩커드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산타클라라 밸리로 알려진 이 지역은 여전히 살구, 배 및 매실 과수원이 거의 전부였다. 곧 이 지역은 실리콘 밸리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당시 트랜지스터 시장은 아주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모토롤라 및 기타 회사들 모두 다른 제품 중에서도 컴퓨터에 사용할 수 있는 더 작고, 더 효율적인 트랜지스터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에니악(ENIAC)이라는 미국 최초의 컴퓨터가 2차 세계대전 중에 군에 의해 개발되었다. 길이 100피트, 높이 10피트 크기에 18,000개의 진공관을 사용했다.

전기 흐름을 제어하는 작은 전자 스위치인 트랜지스터는 진공관을 대신해 컴퓨터를 훨씬 더 강력하게 만들어 줌과 동시에 엄청났던 크기도 줄일 수 있는 수단이었다. 게르마늄과 실리콘으로 만든 작은 크기로 특정 온도에서만 전기를 전도하고, 다른 온도에서는 전기를 차단하는 반도체가 트랜지스터 제조에 유망한 소재로 부각되었다.

쇼클리의 신생기업에서는 많은 젊은 박사들이 노를 수천 도로 가열해 게르마늄과 실리콘을 녹이는 작업으로 매일 아침을 시작했다. 톰 울프는 에스콰이어지와의 인터뷰에서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그들은 흰색 실험복, 고글 및 작업 장갑을 착용했다. 노 문을 열면 주황색과 백색의 이상한 빛줄기가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노 바닥의 끈적끈적하게 녹은 물질을 식히면 결정체가 생성되었다. 핀셋으로 결정체를 꺼내 현미경으로 보면서 다이아몬드 커터로 미세한 슬라이스, 웨이퍼 및 칩 형태로 잘랐다. 아직까지 이 작은 형태의 전자소재에는 이름이 없다. “

쇼클리는 실리콘이 더 유망한 재료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초점을 여기에 맞췄다. 쇼클리의 전기 “Shockley, Broken Genius”를 쓴 조엘 셔킨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이미 최초이자 가장 유명한 반도체 연구를 수행했고, 회사를 세운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게르마늄 작업장의 모든 엔지니어들을 실리콘 작업에 참여하게 했다. 실제, 그의 그런 결정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게르마늄 골짜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쇼클리는 천재였지만,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상사로서는 아주 형편없었다고 한다. 2년 만에 가장 유능한 엔지니어 일부가 회사를 떠나, 페어차일드 반도체라는 회사를 세웠다. 그중 한 명이 20대 중반의 로버트 노이스였다.

그들 중 한 명이 20대 중반에 불과했지만, 이미 트랜지스터에 대한 전문지식으로 유명했던 로버트 노이스였다.



<윌리엄 쇼클리는 게르마늄으로도 연구를 진행했지만, 실리콘이 더 유망한 재료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1959년,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로버트 노이스와 동료들은 몇 개의 트랜지스터를 손톱 크기의 고순도 실리콘 조각 위에 쌓아 올리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는 인텔을 설립에 나섰다.>
1959년, 노이스와 동료들은 몇 개의 트랜지스터를 손톱 크기의 고순도 실리콘 조각 위에 쌓아 올리는 방법을 찾아내는 획기적인 성과를 올렸다. 비슷한 시기,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에서도 게르마늄으로 비슷한 장치를 개발했다. 하지만 노이스의 실리콘이 더 효율적이었고 곧 시장을 장악했다.

나사(NASA)는 우주 프로그램에 사용하기 위해 페어차일드의 마이크로칩을 선택했고, 판매량은 곧 제로에서 1억 3천만 달러로 급등했다. 1968년, 노이스는 자기 회사를 세웠다. 인텔이었다. 이어서 프로그램 가능 컴퓨터 칩이라는 초기 산업을 지배하게 된다.